오미리는 익숙한 빛에 눈을 감았다. 재앙의 도서관에 진입한 지 벌써 스물네 번째. 이제는 책장의 빛깔만 보아도 다음 미션이 얼마나 고될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손이 뻗어 나간 곳에는 마치 밤하늘을 옮겨놓은 듯한 검푸른 표지의 책이 놓여 있었다. 별자리를 형상화한 은빛 문양이 섬뜩할 정도로 선명했다.
“이번에는… 성좌들의 이야기인가.”
강태섭이 묵직한 양손검을 고쳐 쥐며 말했다. 최성재는 쌍권총을 만지작거리며 삐딱하게 서 있었고, 한서영은 조용히 오미리 뒤에 서서 불안한 눈빛으로 책을 응시했다.
오미리가 책을 펼치자, 섬광과 함께 책의 내용이 허공에 펼쳐졌다.
[스물네 번째 이야기 오류] 제목: 성좌들의 침묵 장소: 서울, N타워
이야기 오류 심판을 위한 과제: ‘자신들을 숭배하던 인간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자, 분노한 성좌들은 세상에 절망을 퍼뜨리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진실은, 성좌들이 스스로 빛을 잃고 침묵한 것이었다. 이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 ‘가짜 성좌’를 쓰러뜨려라.’
미션 종료 조건: N타워 최상층, ‘침묵의 별자리’를 상징하는 석판에 진짜 별빛을 되돌려놓아라.
미션 내용이 사라짐과 동시에, 거대한 힘이 오미리와 동료들을 휘감았다. 눈을 뜬 곳은 서울 남산 N타워의 최상층이었다. 사방이 통유리로 된 공간 아래로 빛을 잃은 서울의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건물들은 텅 비었고, 거리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마치 세상의 모든 생명이 사라진 것처럼.
“이게… 진짜 성좌들의 이야기 오류란 말이야?” 강태섭이 중얼거렸다. 그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평화로운 서울의 모습이 이렇게 절망적으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를 압박하는 듯했다.
오미리는 냉철하게 주변을 살폈다.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굳게 다문 입술과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가득했다. “아니. 이건 ‘이야기 오류’가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야. 진짜 성좌들은 침묵했어. 그리고 그 공백을 ‘가짜 성좌’들이 채우고 있는 거지.”
그때, 거대한 그림자가 N타워를 덮쳤다. 거대한 뱀의 형상을 한 괴물이 유리를 타고 기어 올라왔다. 그 몸은 수십 개의 별빛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별빛이 뿜어내는 어둠은 빛을 완전히 흡수하고 있었다.
“저게 바로 ‘가짜 성좌’로군.” 최성재가 쌍권총을 겨누며 말했다. 그의 손가락이 방아쇠에 닿자마자, 불꽃이 튀어나오며 괴물을 향해 날아갔다. 그러나 총알은 별빛으로 이루어진 몸을 통과할 뿐,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했다.
“일반적인 공격은 통하지 않는 것 같아!” 강태섭이 양손검을 휘두르며 괴물의 꼬리를 베어 보았지만, 검날은 허공을 가르는 듯 미끄러졌다.
한서영이 조용히 나섰다. 그녀의 손끝에서 푸른빛이 일렁였다. “기억의 직조… 이 괴물의 기원을 찾아야 해. 왜 성좌의 이름을 쓰고, 왜 이 공간을 장악했는지.”
오미리는 한서영의 능력에 맞춰 쌍단검을 쥔 채로 괴물의 움직임을 분석했다. “녀석의 약점은 별빛이 아닌 ‘어둠’이야. 저 괴물이 뿜어내는 어둠이 진짜 별빛을 가리고 있는 거지.”
괴물은 거대한 입을 벌려 오미리 일행을 향해 어둠의 기운을 내뿜었다. 오미리는 재빨리 쌍단검을 교차시켜 방어막을 만들었다. 어둠의 기운이 방어막에 부딪히며 섬뜩한 소리를 냈다.
“젠장, 끝이 없어!” 강태섭이 소리쳤다.
그때, 한서영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찾았어! 이 괴물은… 사실은 실패한 모조품이야. 진짜 성좌들의 힘을 흉내 내려다 결국은 어둠만을 만들어낸 존재. 이 녀석의 약점은 힘을 끌어내는 원천이야. N타워 꼭대기에 있는 석판에 이 괴물의 힘이 연결되어 있어!”
오미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계획은 간단해. 강태섭과 최성재는 저 괴물의 시선을 끌어줘. 한서영은 내 뒤에서 석판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려줘. 내가 끝낸다.”
“오케이!” 강태섭은 거침없이 괴물에게 돌진했다. 그의 양손검에 푸른 기운이 서렸다. 만능물질화 능력으로 검의 무게와 강도를 극한까지 끌어올린 것이다. 최성재는 N타워의 구조물을 이용해 괴물의 머리 위로 뛰어올랐다. 그의 쌍권총에서 붉은빛이 번개처럼 쏟아졌다. 그의 영웅화 능력으로 한국 최고의 사격 영웅의 능력을 빌려온 것이다. 총알은 빗발치듯 쏟아졌고, 괴물의 몸에 닿아 섬광을 일으켰다.

오미리는 동료들의 활약에 힘입어 괴물의 틈을 파고들었다. 쌍단검에 심판의 시간 능력을 담았다. 이 능력은 단순히 시간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의 흐름을 왜곡시키는 '오류'에 직접 작용하여 그 존재를 삭제하는 능력이다. 그녀의 단검은 빛을 잃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야기의 오류… 너는 성좌의 이야기가 될 수 없어. 네 존재는 이 세상의 모든 진실을 깎아먹고 있어.”
오미리의 단검이 괴물의 몸을 관통했다. 그러나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괴물은 비웃는 듯 더욱 거세게 어둠을 뿜어냈다.
“미리! 석판이야! 석판을 공격해야 해!” 한서영의 외침이 그녀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오미리는 뒤를 돌아보았다. N타워 중앙에 자리한 거대한 석판이 어둠의 힘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녀는 순간 망설였다. 괴물을 눈앞에 두고 석판을 공격하는 것은 위험한 도박이었다. 하지만 망설이는 순간에도 괴물의 어둠은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젠장, 시간이 없어!”
오미리는 몸을 돌려 전속력으로 석판을 향해 달렸다. 괴물은 그녀의 움직임을 예상하지 못한 듯 잠시 주춤했다. 그 틈을 타 강태섭이 거대한 양손검을 휘둘러 괴물을 석판으로부터 잠시 떼어냈다.
“가! 미리! 우리가 막을게!”
오미리는 석판에 도착했다. 석판은 차갑고 매끄러웠으며, 그 표면에는 별자리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모든 별자리는 검은색으로 변해 있었다. 오미리는 심판의 시간 능력을 쌍단검에 모아 석판을 향해 내리찍었다.
“심판의 시간!”
단검이 석판에 닿자, 거대한 균열이 생겼다. 균열 속에서 검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괴물은 비명을 질렀고, 그 몸을 이루고 있던 별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석판의 균열은 이내 닫히려고 했다. 오미리는 이를 악물었다. 힘이 부족했다. 이대로는 미션을 완수할 수 없었다.
그때, 한서영이 그녀의 옆으로 다가왔다. “미리, 기억해. 진짜 별빛의 기억을!”
한서영의 손이 오미리의 어깨에 닿자, 그녀의 머릿속에 수많은 기억의 조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밤하늘을 수놓았던 별빛, 유성우를 보며 소원을 빌었던 기억,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별을 헤아리던 추억. 그것들은 모두 사라졌던 '진짜' 별빛의 기억이었다.
오미리는 눈을 감고 그 기억들을 끌어모았다. 심판의 시간 능력을 '심판'이 아닌 '복원'에 사용했다. 그녀의 쌍단검에서 푸른빛이 흘러나왔고, 균열이 닫히기 직전의 석판에 그 빛을 불어넣었다.

푸른빛이 석판 전체에 번져나갔다. 검은색이었던 별자리가 하나둘씩 본연의 빛을 되찾았다. 그러자 N타워를 휘감고 있던 거대한 괴물이 비명을 지르며 산산이 조각났다. 별빛이 부서진 유리 조각처럼 공중에 흩어졌다.
미션이 종료되었다는 메시지와 함께, N타워를 감싸고 있던 어둠이 걷히고 서울의 야경이 다시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거리의 불빛이 켜지고, 자동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오미리는 주저앉았다.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듯했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의 손에 들린 쌍단검이 차갑게 식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강태섭과 최성재, 한서영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미리, 괜찮아?”
강태섭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오미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것은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다. 존재하지 않던 별빛의 기억을 되찾고, 진짜 별들의 침묵의 의미를 깨달은 후에야 흘릴 수 있는 종류의 눈물이었다.
“진짜 성좌들은… 사라진 게 아니었어. 인간들이 더 이상 자신들을 바라보지 않자, 스스로 빛을 거두고 침묵했던 거야.”
그녀의 말에 동료들은 숙연한 표정이 되었다. 이번 미션은 단순히 괴물을 쓰러뜨리는 것이 아니었다. 사라진 줄 알았던 무언가의 진실을 찾아내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그 진실을 통해 오미리는 다시 한번 성장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고 있었다. 오미리는 다시 한번 쌍단검을 굳게 쥐었다. 이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들은 재앙의 도서관에서 탈출하기 위해, 그리고 이 세상에 남겨진 모든 이야기의 진실을 되찾기 위해 계속해서 나아가야 했다. 다음 책장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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