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적. 숨 막히는 고요함만이 '재앙의 도서관'의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잉크와 낡은 종이 냄새가 뒤섞인 특유의 향기 속에서, 오미리와 동료들은 잠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지난번 미션에서 얻은 상처와 피로가 아직 가시지 않은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운 채였다. 도서관의 시간은 바깥세상과 다르게 흘렀지만, 정신에 새겨진 피로는 사라지지 않았다.
"다음은 또 어떤 지옥이 기다리고 있을까."
최성재가 쌍권총을 매만지며 나직이 읊조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체념과 냉소가 뒤섞여 있었다. 강태섭은 말없이 거대한 양손검을 바닥에 세워둔 채 눈을 감고 있었고, 한서영은 두 손을 불안하게 맞잡은 채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이전보다 깊어졌지만, 그만큼 더 많은 슬픔을 담고 있는 듯했다.
오미리는 묵묵히 서고 사이를 걸었다. 그녀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유난히 어둡고 그늘진 구석이었다. 그곳에 꽂힌 책 한 권이 유독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 표지는 짙은 갈색 가죽으로 되어 있었고, 오랜 세월의 흔적으로 모서리가 닳아 있었다. 제목조차 희미하게 바래 있었지만, 오미리는 손을 뻗어 그 책을 꺼내 들었다.
『과거의 비극』
책을 펼치자마자, 싸늘한 한기가 손끝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책장은 저절로 넘어가며 새로운 미션을 드러냈다.
[서른일곱 번째 이야기의 오류가 발견되었습니다.]
[책 제목: 과거의 비극] [오류 명: 잊혀진 자들의 절규]
[미션: 서울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 스며든 '원한의 통곡'을 멈추고, 뒤틀린 기억의 근원을 찾아 이야기를 바로잡으십시오.]
[장소: 서울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종료 조건: 역사관 전체에 울려 퍼지는 '원한의 통곡'이 완전히 멎는 순간.]
"서대문형무소...?"
강태섭이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그 이름이 가진 무게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고문당하고 스러져간 비극의 장소. 그곳에 이야기의 오류가 발생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번엔 좀... 느낌이 안 좋은데."
최성재의 말에 한서영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녀는 이미 공기 중에 떠도는 슬픔과 원한의 파편들을 느끼는 듯,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오미리는 결심한 듯 동료들을 돌아보았다.
"준비해. 이번 미션은... 힘으로만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닐지도 몰라."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도서관의 풍경이 비틀리기 시작했다. 시야가 암전되었다가 다시 밝아졌을 때, 네 사람은 차갑고 축축한 밤공기 속에 서 있었다.
눈앞에는 거대한 붉은 벽돌 건물이 음산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높다란 담벼락과 철창이 달린 창문들. 달빛만이 희미하게 비추는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의 모습은 평소의 박물관이 아닌, 살아있는 감옥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 순간, 귀를 찢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끄아아아아아악!" "억울하다! 억울해...!"
수백, 수천의 목소리가 뒤섞인 듯한 비명. 단순한 소리가 아니었다. 살을 에는 듯한 한과 고통, 절망이 담긴 '원한의 통곡'이었다. 소리가 공간 전체를 진동시키며 네 사람의 정신을 파고들었다.
"큭...!"
한서영이 가장 먼저 비틀거리며 귀를 막았다. 기억을 다루는 그녀에게, 정제되지 않은 고통의 기억들은 그 자체로 맹독과 같았다. 오미리가 재빨리 그녀를 부축했다.
"괜찮아?" "...너무, 너무 아파... 머릿속이...!"
최성재는 이미 쌍권총을 뽑아 들고 경계 태세를 취했다.
"젠장, 소리만으로도 사람 잡겠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강태섭은 양손검을 고쳐 쥐며 말했다. "단순한 원혼들이 아니야. 이 장소에 깃든 기억 자체가 오염된 것 같아."
그의 말이 맞았다. 주위의 공기가 짙은 안개처럼 검게 변하기 시작하더니, 이내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피와 눈물로 얼룩진 낡은 수의를 입은 망령들이었다. 그들은 텅 빈 눈으로 허공을 헤매며 고통스럽게 울부짖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분노에 차 있기보다, 끝없
는 슬픔과 고통에 잠식된 것처럼 보였다.
"공격할 생각은 없어 보여. 하지만 저 통곡 소리, 계속 들으면 우리 정신이 버티지 못할 거야."
오미리가 냉철하게 상황을 분석했다. 망령들은 그저 자신들의 고통을 끝없이 되새기며 울부짖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울음소리가 바로 이 공간을 잠식하는 '이야기 오류'의 본질이었다.
"서영아, 할 수 있겠어? 이 기억들의 근원을 찾아야 해."
오미리의 말에 한서영은 창백한 얼굴로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해볼게. 하지만... 너무 많아. 너무 깊고, 어두워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그때, 망령들 중 하나가 비틀거리며 그들 쪽으로 다가왔다. 다른 망령들과는 달리, 그 망령의 눈에는 희미한 적의가 서려 있었다.
"방해... 하지 마... 우리의 고통을...!"
순간, 망령의 몸에서 검은 가시 같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위험해!"
최성재가 소리치며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영웅의 기운이 깃든 총알이 망령을 꿰뚫었지만, 망령은 연기처럼 흩어졌다가 다시 형체를 갖출 뿐이었다.
"물리적인 공격은 소용없어!"
강태섭이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만능물질화'!"
그가 손을 짚은 바닥에서 단단한 흑요석 벽이 솟아나 망령들의 접근을 막았다. 하지만 벽 너머로 들려오는 통곡 소리는 더욱 거세졌다. 흑요석 벽에 부딪힌 망령들은 분노하기보다, 더욱 처절하게 울부짖으며 벽을 할퀴었다. 끼이익,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벽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벽이 오래 버티지 못해! 미안하지만 저들을 잠시 묶어둘 수밖에 없겠어!"
강태섭이 다시 한번 능력을 사용했다. 흑요석 벽이 녹아내리며 끈적한 타르처럼 변해 망령들의 발을 묶었다. 망령들은 버둥거렸지만, 그들의 움직임은 현저히 느려졌다.
"시간을 벌었어. 서영아, 지금이야!"
오미리가 한서영의 어깨를 붙잡았다. 한서영은 심호흡을 한 뒤, 눈을 감았다. "'기억의 직조'!"
그녀의 손끝에서 은은한 빛을 내는 수십 개의 실이 뿜어져 나와 허공으로 흩어졌다. 실들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주위의 망령들에게, 그리고 감옥 건물 자체로 스며들어 갔다. 한서영의 눈앞에 수천, 수만의 뒤엉킨 기억들이 폭풍처럼 몰아쳤다.
고문의 고통, 배신에 대한 분노, 가족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조국을 향한 뜨거운 사랑. 긍정적이고 고결한 기억들조차 끔찍한 고통과 절망에 오염되어 검게 변해 있었다.
"아... 아아..."
한서영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너무나 방대한 슬픔의 총량에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이 모든 기억의 강줄기가 시작되는 단 하나의 '근원'을 찾아야 했다. 가장 깊고, 가장 어두운 곳에 숨겨진 최초의 '오염원'을.
"서영아!"
비틀거리는 그녀를 보고 오미리가 외쳤다. "포기하지 마! 너라면 할 수 있어!"
동료의 목소리에 한서영은 간신히 정신을 다잡았다. 그녀는 기억의 폭풍 속에서 필사적으로 헤엄쳤다. 그러다 문득, 유독 다른 기억들과 이질적인, 칼날처럼 날카롭고 차가운 하나의 기억을 발견했다.
그것은 '배신'의 기억이었다.
독립운동 단체의 핵심 인물이었던 한 남자. 그는 동료의 배신으로 붙잡혀 이곳으로 끌려왔다. 그는 모진 고문 속에서도 동지들의 이름을 발설하지 않았지만, 그의 눈앞에서 다른 동료들이 하나둘씩 변절하고 무너지는 모습을 봐야만 했다. 그의 신념과 희생이 동료의 배신으로 인해 무가치하게 변해버렸다는 절망감. 조국을 되찾고자 했던 그의 숭고한 의지는 결국 '인간에 대한 깊은 불신과 증오'라는 독으로 변질되었다.
그가 죽어가며 남긴 마지막 유언은 조국의 독립이 아닌, "아무도 믿지 마라. 인간은 결국 서로를 배신할 뿐이다." 라는 저주였다.
이 저주가 바로 '이야기 오류'의 핵이었다. 그의 강력한 원념이 씨앗이 되어, 이곳에 잠든 다른 순국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의 기억마저 '배신당한 자들의 헛된 죽음'으로 오염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찾았어...!"
한서영이 눈을 번쩍 떴다. "10번 감방... 지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독방이야! 모든 원한이 그곳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어!"
그 순간, 강태섭이 묶어두었던 망령들이 타르를 뚫고 일제히 일어나 그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들의 눈동자에 이전에는 없던 명백한 살의가 번뜩였다. 근원을 건드리자, 방어기제가 발동한 것이다.
"이야기가 길어지겠는데!"
최성재가 혀를 차며 망령들을 향해 총구를 겨눴다. "강태섭! 길을 열어! 한서영은 내가 엄호한다! 오미리, 네가 해결해야 해!"
최성재가 '영웅화' 능력을 발동했다. 그의 몸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오며, 마치 전장의 명장과 같은 위엄이 서렸다. 그의 총알은 이제 단순한 물리적 타격이 아닌, 망령의 존재 자체를 잠시나마 소멸시키는 정화의 힘을 띠기 시작했다.
"알았어!"
강태섭이 땅에 주먹을 내리쳤다. 그들 앞에서부터 지하 감방으로 향하는 길을 가로막던 망령들과 건물 파편들이 거대한 손에 의해 움켜쥐어지듯 양옆으로 치워지며 하나의 길이 만들어졌다.
"가자!"
오미리가 쌍단검을 뽑아 들고 가장 먼저 달려 나갔다. 그녀의 뒤를 한서영이, 그리고 그들의 양옆을 강태섭과 최성재가 단단히 지키며 따랐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축축하고 어두웠다. 사방에서 스며 나오는 한기는 뼈를 시리게 할 정도였다. 벽에서는 검은 물이 배어 나왔고, 그 물은 마치 피눈물처럼 보였다. 통곡 소리는 이제 고막을 찢을 듯이 가까운 곳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마침내 도착한 지하 독방. 굳게 닫힌 쇠창살 문 안쪽은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하지만 그 어둠 속에서, 이 모든 원한의 근원이 되는 존재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다른 망령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압도적인 존재감. 새까만 원념이 형상화된 듯한 그 망령은 온몸이 뒤틀려 있었고, 텅 빈 눈구멍에서는 검은 증오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의 절망을... 나의 고통을... 네놈들이 뭘 안다고...!]
망령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직접 울려 퍼졌다.
"당신의 희생은 숭고했어. 하지만 그 끝이 증오와 저주여서는 안 돼."
오미리가 단검을 고쳐 쥐며 말했다.
[희생이라고? 배신자들을 위한 개죽음이었을 뿐이다!]
망령이 포효하자, 독방의 쇠창살이 비명을 지르며 엿가락처럼 휘어졌다. 검은 원념의 파편들이 총알처럼 사방으로 튀었다.
"피해!"
강태섭이 거대한 방패를 물질화하여 동료들 앞을 막아섰다. '콰콰쾅!' 방패에 부딪힌 파편들이 폭발하며 지하 공간 전체를 뒤흔들었다.
"미리야!"
한서영이 외쳤다. "내가 그의 기억에 길을 열게! 당신의 고통은 배신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걸 보여줘야 해! 당신의 희생 덕분에, 우리가 지금 여기에 서 있다는 걸!"
한서영이 다시 한번 '기억의 직조'를 사용했다. 이번에는 단 하나의 대상을 향해서였다. 그녀의 손끝에서 나온 빛의 실들이 망령의 검은 원념을 뚫고 그의 이마에 닿았다.
[크아아악! 이 하찮은 기억은 뭐냐!]
망령은 격렬하게 저항했다. 한서영이 보여주는 해방된 조국의 모습, 평화로운 거리, 웃고 있는 사람들의 기억을 부정하며 더욱 거센 증오를 뿜어냈다. 한서영의 입가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버텨, 서영아!"
최성재가 망령의 움직임을 봉쇄하기 위해 쉴 새 없이 총을 쏘아댔다. 강태섭은 계속해서 벽과 방패를 만들어내며 망령의 발악적인 공격을 막아냈다.
"지금이야, 미스터 오!"
오미리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바닥을 박차고 질풍처럼 달려 나갔다. 망령이 뿜어내는 원념의 기운이 그녀의 피부를 스치며 살을 에는 고통을 주었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한서영이 필사적으로 망령의 기억을 붙들고 있는 틈. 동료들이 목숨을 걸고 만들어준 단 한 번의 기회.
오미리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심판의 시간'!"
그녀의 쌍단검에 은백색의 순수한 기운이 휘감겼다. 이것은 파괴를 위한 힘이 아니었다. 잘못 쓰인 이야기를 원래의 자리로 되돌리는, '수정'의 힘이었다.
오미리는 망령의 핵, 그의 가슴 깊숙한 곳에 응어리진 '배신의 기억'을 향해 단검을 찔러 넣었다.
[크어어...!]
망령의 몸부림이 멎었다. 오미리는 단검을 쥔 손에 힘을 주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당신의 이야기는 비극으로 끝나지 않아. 당신의 고귀한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았어. 이제 그만... 편히 쉬어."
단검 끝에서 퍼져나간 은백색 빛이 망령의 온몸을 감쌌다. 검게 물들었던 원념이 씻겨 내려가고, 본래의 맑은 영혼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뒤틀렸던 그의 형상이 점차 뚜렷해지며, 고통과 증오로 일그러졌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아... 그랬군... 나의 끝은... 이게 아니었어...]
망령은 한 줌의 빛이 되어 스러졌다.
그리고 그 순간,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전체를 뒤덮고 있던 '원한의 통곡'이 거짓말처럼 멎었다. 지긋지긋한 한기와 압박감이 사라지고, 차갑지만 상쾌한 새벽 공기가 그 자리를 채웠다.
창살 틈으로 동이 트는 아침 햇살이 비쳐들었다. 햇살은 지하의 어둠을 부드럽게 몰아내며, 이곳에 잠든 영혼들을 위로하는 듯했다.
[서른일곱 번째 이야기의 오류가 수정되었습니다.]
도서관의 목소리와 함께, 네 사람의 몸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들은 익숙한 '재앙의 도서관'에 돌아와 있었다.
모두가 말없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특히 한서영은 모든 기력을 소진한 듯,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오미리가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가만히 두드려주었다.
"잘했어, 서영아. 네 덕분이야."
한서영은 대답할 기력도 없는지, 그저 희미하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이번 미션은 물리적인 전투보다 더 힘겨운 싸움이었다. 과거의 비극이 남긴 깊은 상처를 마주하고, 그 아픔을 보듬어주는 과정이었다. 그들은 또 한 번, 이 도서관에서의 싸움이 단순히 괴물을 베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것은 무너진 이야기를 바로 세우고, 잊혀진 진실을 되찾는 성스러운 투쟁이었다.
오미리는 방금 전 미션이 담겨 있던 책, 『과거의 비극』을 제자리에 꽂았다. 책은 이제 더 이상 불길한 기운을 뿜어내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한 시대의 아픔과 그것을 이겨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품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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