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앙의 도서관

서른여섯 번째 책: 재앙의 서고 아래

risingduck 2025. 9. 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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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함. 오미리의 손끝이 책등을 스칠 때마다 내려앉는 먼지들이 유일한 움직임이었다. ‘재앙의 도서관’은 언제나처럼 침묵 속에서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많은 책장, 무한히 뻗어 나가는 서고의 미로 속에서 그녀는 홀로 운명의 갈피를 찾고 있었다. 강태섭과 최성재, 한서영은 잠시 숨을 고르며 그녀의 선택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들의 운명은 이제 오미리가 펼쳐 들 다음 책의 첫 문장에 달려 있었다.

 

마침내, 그녀의 손길이 한 권의 책 위에서 멈췄다.

 

아무런 장식도, 제목도 없는 낡고 두꺼운 가죽 양장본. 마치 도서관의 역사 그 자체를 짊어진 듯한 무게감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오미리가 책을 뽑아 들자, 먼지 쌓인 표지 위로 희미한 글자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잊혀진 도시의 비망록』

 

책을 펼치자마자, 익숙한 시스템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이야기 오류’를 발견했습니다.] [미션: 은폐된 진실을 심판하고, 두 번째 ‘소멸’을 막으십시오.]

 

[오류 내용: 과거, 서울 지하 깊은 곳에 존재했던 최첨단 지하 도시 ‘아르카디아’. 공식 기록에 따르면 원인 불명의 역병으로 하룻밤

사이 모든 주민이 소멸하고 도시는 봉쇄되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진실은 다릅니다. 역병은 허상. 아르카디아의 소멸 원인은 도시의 심장이자 동력원이었던 ‘아크 원자로’의 폭주였습니다. 당시 관리자들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진실을 은폐하고 모든 기록을 삭제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봉인된 아크 원자로가 한계에 도달하여 서울의 심장부를 거대한 크레이터로 만들 두 번째 ‘소멸’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미션 장소: 서울, 코엑스 스타필드 별마당 도서관 지하 4층, 폐쇄된 지하철 환승 통로.] [종료 조건: ‘아크 원자로’의 안정화.]

 

“젠장, 이번엔 스케일이 장난 아닌데.”

 

미션 내용을 공유받은 최성재 씨가 나직하게 욕설을 뱉었다. 그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단순한 괴물 퇴치가 아니야. 시간제한이 있는 재난 방어 미션인가.”

 

강태섭 씨가 양손검을 고쳐 쥐며 말했다. 그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진중했다.

오미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시선은 이미 미션의 핵심을 꿰뚫고 있었다.

 

“이번 미션의 열쇠는 한서영 씨가 쥐고 있을지도 몰라. ‘기억’을 파헤쳐야 하니까.”

 

그녀의 말에 한서영 씨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폐쇄된 도시, 수많은 사람들의 절망적인 마지막 기억. 그것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사실이 그녀를 짓눌렀다.

 

“괜찮아, 서영 씨. 우린 언제나처럼 당신을 지킬 거야.”

 

오미리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쥐었다. 그 온기에 한서영 씨는 불안하게 떨리던 눈동자를 들어 오미리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책의 마지막 페이지가 저절로 넘어가며 눈을 멀게 하는 빛이 사방을 집어삼켰다. 익숙한 공간 이동의 감각. 위장이 뒤틀리는 듯한 불쾌감이 사라졌을 때, 그들은 전혀 다른 공간에 서 있었다.

 

1. 별빛 아래, 망각의 심연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아이러니 그 자체였다.

수만 권의 책이 천장까지 닿을 듯 웅장하게 꽂힌 서가, 그 사이를 부드럽게 감싸는 따뜻한 조명, 커피 향과 종이 냄새가 어우러진 평화로운 공간.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으로 손꼽히는 ‘별마당 도서관’의 풍경이었다. 그러나 그들 네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 보였다. 평화로운 일상과 자신들 사이에 그어진, 넘어갈 수 없는 투명한 벽.

 

“미션 장소는 여기가 아니야. 지하 4층, 폐쇄된 통로랬지.”

 

오미리가 주변을 빠르게 훑으며 말했다. 사람들은 그들을 인식하지 못하는 듯 책을 읽거나 대화를 나누며 자신들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마치 유령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이쪽이야.”

 

최성재 씨가 손가락으로 한쪽 구석의 ‘관계자 외 출입금지’ 표지판이 붙은 문을 가리켰다. 강태섭 씨가 망설임 없이 문고리를 잡고 비틀자, 굳게 잠겨 있어야 할 문이 허무할 정도로 쉽게 열렸다. 문 너머는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한 발짝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등 뒤의 문이 소리 없이 닫혔고, 별마당 도서관의 소음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싸늘한 냉기와 곰팡이 냄새, 그리고 아득한 심연에서 울려오는 듯한 기계음이 그들을 맞았다.

 

“플래시.”

 

오미리의 나직한 말에 최성재 씨와 강태섭 씨가 각자 권총과 검의 손잡이에 부착된 전술 조명을 켰다. 세 줄기 빛이 어둠을 가르자, 먼지 쌓인 지하철 승강장의 모습이 드러났다. ‘아르카디아 입구’라고 적혀 있었을 법한 낡은 표지판이 반쯤 부서져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진짜로 이런 곳이 있었을 줄이야.”

 

강태섭 씨가 감탄인지 한숨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끼이익, 끼이익… 불쾌하게 신경을 긁는 소리. 최성재 씨가 즉각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쌍권총을 겨눴다.

 

빛이 닿은 곳에는 반투명한 형체의 ‘무언가’가 있었다. 생전의 복장을 한 채,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허공을 헤매는 사람들. 역병으로 죽었다고 알려진 아르카디아의 주민들이었다.

 

“‘에코’인가.”

오미리가 쌍단검을 꺼내 들며 중얼거렸다. ‘이야기 오류’가 만들어 낸 망령들. 그들은 산 자의 생명력에 이끌려 본능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서영 씨, 내 뒤로!”

 

강태섭 씨가 양손검을 앞으로 내지르며 방어 자세를 취했다. 거대한 검신이 든든한 방패가 되어 한서영 씨를 가렸다.

 

“숫자가 너무 많아! 끝이 없어!”

 

최성재 씨의 총구에서 불꽃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특수 제작된 은탄이 에코들의 형체를 꿰뚫을 때마다 비명과 함께 흩어졌지만, 이내 다른 에코들이 그 자리를 메웠다. 마치 무한히 증식하는 바이러스 같았다.

 

“이대로는 끝이 없어. 원인을 찾아야 해.”

 

오미리는 전투를 동료들에게 맡긴 채, 차갑게 주변을 살폈다. 에코들은 특정 방향에서 꾸준히 나타나고 있었다. 바로 승강장 아래, 어둠이 짙게 깔린 선로 쪽이었다.

 

“태섭 씨! 성재 씨! 길을 열어줘! 저 선로 아래로 가야 해!”

 

“알았어!”

 

강태섭 씨가 함성을 내지르며 양손검을 바닥에 내리찍었다.

 

“만능물질화: 충격의 파동!”

 

그의 검 끝에서부터 푸른빛의 에너지 파동이 터져 나와 바닥을 타고 퍼져나갔다. 파동에 휩쓸린 에코들이 비명을 지르며 공중으로 튕겨 나갔다. 잠시나마 길이 열렸다.

 

“지금이야!”

 

오미리가 가장 먼저 어두운 선로 아래로 몸을 던졌다. 뒤이어 최성재 씨가 한서영 씨를 엄호하며 뛰어내렸고, 강태섭 씨가 마지막으로 합류했다.

 

선로 아래는 상황이 더욱 심각했다. 사방의 벽과 천장에서 스며 나오듯 에코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희미한 비상등 불빛 아래, 그들의 일그러진 얼굴이 끝없이 명멸했다.

 

“서영 씨! 이제부터 당신에게 달렸어!”

 

오미리가 외쳤다.

 

“이 도시의 ‘기억’을 읽어야 해! 아크 원자로로 가는 길, 그리고 그걸 멈출 방법을 찾아!”

 

“하지만… 이들의 기억은…”

 

한서영 씨가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눈앞의 에코들은 단순한 괴물이 아니었다. 끔찍한 고통 속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잔념이었다. 그들의 기억에 동조하는 것은 곧 그들의 고통을 맨몸으로 받아내는 것과 같았다.

 

“할 수 있어. 당신은 혼자가 아니잖아.”

 

오미리의 단호한 목소리가 그녀의 불안을 갈랐다. 한서영 씨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더 이상 과거의 상처에 갇힌 내성적인 소녀가 아니었다. 동료를 위해, 그리고 이 잘못된 이야기를 바로잡기 위해 싸우는 전사였다.

 

“기억의 직조.”

 

한서영 씨가 눈을 감고 두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녀의 손끝에서 은은한 은빛 실타래들이 풀려 나오기 시작했다. 실타래들은 살아있는 것처럼 주변으로 뻗어 나가, 가장 가까운 에코의 형체에 닿았다.

 

2. 잔향 속의 진실

 

“으… 아아악!”

 

은빛 실이 닿는 순간, 한서영 씨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수십, 수백 명의 절망적인 마지막 순간이 파도처럼 그녀의 정신을 덮쳤다. 살갗이 녹아내리는 고통, 숨이 막히는 공포, 가족을 잃은 슬픔, 그리고 배신감. 역병 따위는 없었다. 그들은 믿었던 도시의 시스템에 의해 산 채로 ‘처리’되고 있었다.

 

“서영 씨!”

 

최성재 씨가 그녀에게 달려가려 했지만, 사방에서 덮쳐오는 에코들 때문에 한 발짝도 뗄 수 없었다. 그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이대로 가다간 한서영 씨가 기억의 파도에 휩쓸려 정신이 붕괴될 터였다.

 

“집중해, 성재 씨! 우리가 버텨야 서영 씨가 시간을 벌 수 있어!”

 

강태섭 씨가 거대한 검을 휘두르며 포효했다. 그의 검은 단순한 강철이 아니었다. 그의 의지에 따라 형태와 기능이 바뀌는 만능물질. 그는 검을 거대한 방패로 변형시켜 밀려드는 에코의 파도를 막아냈다.

 

“젠장, 젠장!”

 

최성재 씨는 이를 악물고 방아쇠를 당겼다. ‘영웅화’. 그의 능력이 발동하며 눈빛이 변했다. 그의 몸에 깃든 것은 전설적인 명사수, 모든 움직임이 계산되고 모든 탄환이 목표를 찾아가는 저격수의 영혼이었다.

 

탕! 탕! 탕!

그의 총구에서 발사된 탄환은 더 이상 직선으로 날아가지 않았다. 벽과 기둥에 몇 번씩 튕겨 나가며, 한서영 씨에게 접근하는 에코들의 급소만을 정확하게 꿰뚫었다. 신기에 가까운 곡사 사격이었다.

그 사이, 오미리는 한서영 씨의 바로 옆을 지키고 있었다. 그녀는 쏟아지는 에코들을 상대하면서도, 한서영의 상태를 예의주시했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고,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부탁이야, 서영 씨. 조금만 더 버텨줘.’

 

오미리는 마음속으로 외치며 쌍단검을 휘둘렀다. 그녀의 움직임은 춤사위처럼 유려하면서도 치명적이었다. 그녀는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최대한의 효율을 뽑아내며 에코들을 베어 나갔다. 하지만 적의 수는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바로 그때, 고통에 몸부림치던 한서영 씨의 눈이 번쩍 뜨였다.

 

“찾았어…!”

 

그녀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지만, 분명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중앙 통제실… 아크 원자로를 제어하는 곳이야. 이쪽 통로 끝, 제3 방어벽 너머에 있어!”

 

그녀의 손가락이 어둠 속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동시에 그녀가 읽어낸 아르카디아의 지도가 세 사람의 머릿속에 이미지로 펼쳐졌다.

 

“그리고… 멈추는 방법은… 암호가 아니야. 물리적인 충격… 코어를 지키는 세 개의 ‘제어봉’을 동시에 파괴해야 해…!”

 

정보를 전달한 한서영 씨가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서영 씨!”

 

강태섭 씨가 방패를 해제하고 그녀를 부축했다.

 

“정신만 잃었을 뿐이야. 살아있어.”

 

오미리가 빠르게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고 말했다.

 

“시간이 없어. 서영 씨가 알려준 길로 간다. 태섭 씨, 서영 씨를 부탁해. 성재 씨, 후방을 맡아줘!”

 

오더는 즉각적으로 내려졌다. 그들은 한서영 씨가 알려준 통로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에코들은 끈질기게 그들을 추격했다. 마치 진실에 다가서는 것을 막으려는 도시의 마지막 저항처럼 느껴졌다.

얼마나 달렸을까. 거대한 강철 벽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제3 방어벽’.

 

“비켜!”

 

강태섭 씨가 한서영 씨를 오미리에게 잠시 맡기고 앞으로 나섰다. 그는 두 손을 방어벽에 얹고 숨을 골랐다. 그의 팔뚝 근육이 강철처럼 부풀어 올랐다.

 

“만능물질화: 분자 붕괴!”

 

그의 손바닥이 닿은 부분부터 방어벽이 모래처럼 부서져 내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사람이 지나갈 만한 거대한 구멍이 뚫렸다.

방어벽 너머는 거대한 돔 형태의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도시의 심장, ‘아크 원자로’가 있었다.

푸른빛을 내뿜으며 불규칙하게 맥동하는 거대한 구체. 주변의 공간마저 일그러뜨리는 엄청난 에너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원자로를 지키듯, 세 개의 거대한 제어봉이 원자로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이런 건… 들은 적 없는데.”

 

최성재 씨의 목소리가 절망적으로 떨렸다.

원자로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거대한 존재. 키는 족히 10미터는 넘어 보이는 인간형 기계. 온몸이 백금처럼 빛나는 장갑으로 덮여 있었고, 얼굴 부분에는 붉은 외눈 렌즈가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경고. 데이터베이스에 없는 침입자 발견.]

 

차가운 기계음이 돔 전체에 울려 퍼졌다.

 

[본 개체, ‘사서’의 임무는 ‘이야기’의 보존.] [너희는 수정되어야 할 ‘오류’다.] [지금부터 ‘오류 수정’ 절차를 개시한다.]

원자로의 수호자, ‘사서’가 그들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거대한 돔이 울렸다.

 

3. 심판의 시간

 

“젠장, 저런 괴물이 있을 줄이야!”

 

최성재 씨가 사서를 향해 쌍권총을 난사했다. 탕! 탕! 탕! 그러나 탄환들은 사서의 백금 장갑에 흠집 하나 내지 못하고 그대로 튕겨 나갔다.

 

“물리 공격은 통하지 않는 건가!”

 

“아니, 장갑이 너무 두꺼운 거야!”

 

강태섭 씨가 양손검을 거대한 해머 형태로 변화시켜 사서를 향해 돌진했다.

 

“이거나 먹어라, 깡통 로봇!”

 

콰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해머가 사서의 가슴팍을 강타했다. 하지만 사서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가슴을 친 해머를 거대한 손으로 붙잡았다.

 

[분석 완료. 위협 수준: 낮음.]

 

사서의 붉은 외눈이 번쩍이더니, 강태섭 씨를 해머째로 들어 올려 바닥에 내리꽂았다.

 

“크헉!”

 

바닥이 부서지고 강태섭 씨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가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이, 사서의 발이 그를 밟아 으깨기 위해 들어 올려졌다.

 

“태섭 씨!”

 

오미리가 비명처럼 외치며 사서의 다리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녀의 쌍단검이 사서의 장갑 이음새를 파고들었다. 치이익! 금속 마찰음과 함께 불꽃이 튀었지만, 깊이 파고들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사서의 공격이 잠시 멈칫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최성재 씨가 다시 능력을 사용했다. 이번에 그의 몸에 깃든 것은 전장의 지휘관.

 

“영웅화: 이순신! 오미리 씨, 다리 관절! 강태섭 씨, 일어나서 허리를 공격해! 동시에 친다!”

 

그의 외침에 정신을 차린 강태섭 씨가 포효하며 일어섰다. 오미리는 즉시 최성재 씨의 의도를 파악하고 자세를 낮춰 사서의 발목 관절을 노렸다.

 

“하나, 둘, 셋!”

 

세 사람의 공격이 정확히 같은 타이밍에 사서의 각기 다른 부위에 꽂혔다.

콰과광!

 

사서의 거대한 몸이 처음으로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위협 수준 재조정. 위험 요소: 연계 공격. 대응 프로토콜 가동.]

 

사서의 외눈이 붉게 빛나더니, 등에서 수십 개의 작은 포문이 열렸다.

 

“피해!”

 

오미리가 외쳤지만 이미 늦었다. 포문에서 발사된 수십 줄기의 에너지 빔이 돔 내부를 무차별적으로 난사했다. 피할 곳은 없었다.

 

‘여기까지인가….’

 

오미리가 눈을 감는 순간, 그녀의 앞을 누군가 가로막았다. 정신을 차린 한서영 씨였다. 그녀는 의식이 없는 와중에도 동료들의 위험을 감지하고 본능적으로 움직인 것이다.

 

“기억의 직조: 망각의 장막!”

 

그녀의 손에서 펼쳐진 은빛 실들이 거대한 커튼처럼 그들 앞을 가렸다. 에너지 빔이 은빛 커튼에 부딪히자, 힘을 잃고 안개처럼 흩어졌다. 하지만 능력을 사용한 한서영 씨는 다시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서영 씨!”

 

동료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두 번이나 목숨을 거는 모습을 본 오미리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분노와 슬픔,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끝내야 한다는 강렬한 사명감이 그녀의 내면에서 폭발했다.

 

그녀는 더 이상 사서를 단순한 ‘적’으로 보지 않았다. 이 비극적인 ‘이야기’를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는 ‘시스템의 수호자’. 그렇다면 부숴야 할 것은 저 거대한 기계가 아니라, 기계를 움직이는 ‘거짓된 이야기’ 그 자체였다.

 

“심판의 시간.”

 

오미리의 입에서 나직한 선언이 흘러나왔다.

그녀의 주변 공기가 바뀌었다. 시간의 흐름이 느려지는 듯한 감각. 그녀의 두 눈이 심판의 저울처럼 날카롭게 빛났다. 그녀의 시야에, 사서의 형체 위로 이 기계를 구속하고 있는 거대한 ‘이야기의 사슬’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르카디아는 역병으로 멸망했다’는 거짓된 기록, 진실을 은폐하라는 관리자들의 마지막 명령. 그 모든 것이 사서를 움직이는 동력이었다.

 

오미리는 달렸다. 느려진 세상 속에서 오직 그녀만이 제 속도를 유지했다. 그녀는 사서의 무차별적인 공격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하며, 그것을 묶고 있는 ‘사슬’을 향해 쌍단검을 휘둘렀다.

 

그녀의 칼날은 더 이상 물리적인 장갑을 베지 않았다. ‘이야기의 오류’ 그 자체를 베고 있었다.

 

서걱!

 

첫 번째 사슬이 끊어졌다. ‘역병’이라는 거짓된 원인이 사라졌다. 사서의 움직임이 순간적으로 둔해졌다.

 

[시스템 오류… 원인 데이터 소실….]

 

서걱!

 

두 번째 사슬이 끊어졌다. ‘진실을 은폐하라’는 명령이 사라졌다. 사서의 붉은 외눈이 혼란스럽게 깜빡였다.

 

[명령 체계… 붕괴… 나는… 누구….]

 

이제 마지막 사슬만이 남았다. 이 도시가 ‘잊혀져야 한다’는 가장 근원적인 저주.

오미리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 단검을 고쳐 쥐었다. 그리고 사서의 심장부, 아크 원자로와 연결된 마지막 사슬을 향해 몸을 날렸다.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야!”

 

그녀의 외침과 함께, 단검이 사슬을 끊어냈다.

 

쨍그랑!

 

사슬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사서의 온몸을 감싸던 백금 장갑이 빛을 잃고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모든 동력을 잃은 거대한 강철 인형은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아 움직임을 멈췄다.

 

“…해냈어.”

 

최성재 씨가 망연자실하게 중얼거렸다. 강태섭 씨는 말없이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었다.

 

위이이잉-!

 

수호자를 잃은 아크 원자로가 통제를 벗어나 폭주하기 시작했다. 돔 전체가 붉은 경고등으로 번쩍였고,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릴 듯한 진동이 시작되었다.

 

“제어봉! 서영 씨가 말한 세 개의 제어봉을 동시에 파괴해야 해!”

 

오미리가 외쳤다. 그녀는 강태섭 씨를, 최성재 씨를, 그리고 쓰러진 한서영 씨를 차례로 돌아보았다. 모두가 한계였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는 포기라는 단어가 없었다.

 

“내가 둘을 맡을게.”

 

강태섭 씨가 해머를 두 개로 물질화하며 일어섰다.

 

“나머지 하나는 내가.”

 

최성재 씨가 마지막 남은 탄환을 장전하며 제어봉 하나를 겨눴다.

 

“내가 신호를 주면 동시에 하는 거야!”

 

오미리가 외쳤다. 그녀는 무너지는 돔의 파편들을 피해 중앙으로 달려갔다.

 

“지금!”

 

그녀의 외침과 함께, 강태섭 씨의 해머 두 개와 최성재 씨의 총탄이 정확히 같은 순간에 세 개의 제어봉을 강타했다.

콰과과과광!

 

엄청난 굉음과 함께 제어봉이 파괴되고, 아크 원자로에서 뿜어져 나오던 푸른빛이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붉은 경고등이 꺼지고, 지진 같은 진동이 멎었다.

 

정적이 흘렀다.

 

폭주를 멈춘 원자로의 잔해 속에서, 작은 빛의 조각 하나가 떠올랐다. ‘이야기의 파편’이었다. 오미리가 손을 뻗어 그것을 잡는 순간, 그들의 몸이 다시 빛에 휩싸였다.

 

재앙의 도서관으로 귀환한 그들은 말없이 서로를 부축했다. 특히 한서영 씨의 희생은 모두의 마음에 무겁게 새겨졌다. 그녀의 능력은 이 잘못된 이야기를 바로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그 대가는 너무나도 컸다.

 

오미리는 손안에서 빛나는 ‘이야기의 파편’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잊혀진 도시 아르카디아의 진짜 역사. 그것은 이제 그녀의 손안에서 새로운 이야기의 일부가 될 터였다. 그녀는 동료들을 돌아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가자. 아직 우리가 바로잡아야 할 이야기는 많이 남아있으니까.”

 

그녀의 목소리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 안에는 결코 꺾이지 않을 강철 같은 의지가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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