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립국악원에서 돌아온 후, <이야기 상담소>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한서영은 찢겨진 기억의 파편들을 받아낸 후유증으로 며칠간 깊은 잠에 빠졌고, 오미리는 밤새도록 다음 수수께끼를 분석하며 잠들지 못했다.
'거울 속에 비친 진실이 거짓을 말하는 탑에서, 가장 높은 자의 눈물이 떨어질 때.'
적의 악의는 교묘했다. 이전처럼 명확한 장소가 아닌, 은유와 상징으로 가득 찬 문장을 던져두었다. 오미리는 서울의 모든 '탑' 형태의 건축물을 지도 위에 표시했다. 남산타워, 종탑, 그리고… 압도적인 높이로 도시를 내려다보는, 그 자체가 현대 서울의 욕망과 서사를 상징하는 거대한 유리탑.
"…롯데월드타워." 며칠 만에 눈을 뜬 한서영이 지도를 보며 나직이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아직 잠겨 있었지만, 눈빛만은 선명했다. "탑 전체가 거대한 거울이잖아. 그리고 그 안에서 사람들은 현실보다 더 나은 환상을 보려고 해. 진실(현실)을 비추지만, 거짓(욕망)을 말하는 곳. 분명 거기야."
"가장 높은 자의 눈물은?" 오미리가 물었다.
"아직은 모르겠어. 하지만… 그곳의 이야기들이 '공포'에 질려있어. 무언가 끔찍한 일이 일어날 거라고, 모두가 비명을 지르고 있어." 한서영의 얼굴이 다시 창백해졌다. 페이지 포식자는 이미 다음 사냥터에 마수를 뻗치고 있었다.
국악원이 '과거'의 기억을 상징했다면, 롯데월드타워는 '현재'와 '미래'의 서사를 품고 있는 곳이었다. 사람들의 꿈, 야망, 성공과 좌절, 사랑과 이별. 수많은 현대의 이야기들이 그곳에서 태어나고 있었다. 포식자는 이제 이야기의 뿌리를 넘어, 현재진행형인 줄기까지 먹어치우려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결전의 준비를 마쳤다. 이전의 싸움과는 달랐다. 이번에는 이야기가 완전히 먹히기 전에, 선제적으로 움직여야 했다.
해가 저물기 시작한 잠실. 롯데월드타워는 석양을 받아 거대한 황금빛 창처럼 빛나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지만, 그곳에 가까워질수록 두 사람은 불길한 혼돈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타워의 유리 벽면에 비친 사람들의 모습이 미세하게 뒤틀렸다. 웃고 있는 사람의 입꼬리가 순간적으로 찡그려졌다가 돌아오고, 바쁘게 걷는 행인의 걸음이 잠시 허공을 맴돌았다. 타워 주변의 디지털 광고판들은 알아볼 수 없는 노이즈와 함께, '도망쳐', '거짓이야', '끝이 오고 있어' 같은 절망적인 문장들을 1프레임 단위로 깜빡거렸다.
"…이미 시작됐어." 오미리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두 사람은 관광객으로 위장한 채, 초고속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목적지는 가장 높은 곳, 서울 스카이 전망대였다. 엘리베이터 내부의 벽면을 가득 채운 미디어 월에서는 서울의 발전사를 보여주는 화려한 영상이 흘러나왔지만, 그 영상 사이사이에 찢겨진 책 페이지와 비명을 지르는 얼굴들이 스치듯 지나갔다.
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그들은 전망대에 발을 디뎠다. 그리고 그 순간,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숨을 삼켰다.
전망대는 혼돈의 소용돌이, 그 자체였다. 사방이 유리로 된 벽면과 바닥은 더 이상 서울의 아름다운 야경을 비추지 않았다. 대신, 수만 개의 거울 조각처럼 깨어져 각기 다른 뒤틀린 풍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어떤 거울에는 불타는 도시가, 어떤 거울에는 폐허가 된 잠실이, 또 다른 거울에는 비명을 지르며 떨어지는 사람들의 모습이 비쳤다. 진실과 거짓, 현실과 환영이 뒤섞인 거대한 만화경이었다.
그리고 그 혼돈의 중심에, '페이지 포식자'가 서 있었다. 그것은 마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두 팔을 벌린 채, 이 모든 혼돈을 즐기고 있었다.
[어서 와라, 나의 주인공들. 너희를 위한 특별한 무대를 준비했다.]
그런데 포식자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앞을 막아서듯, 두 명의 인영이 등을 보인 채 서 있었다. 너무나도 익숙한, 단 한 순간도 잊어본 적 없는 뒷모습이었다. 거대한 양손검을 어깨에 멘 듬직한 거구와, 날렵한 몸에 쌍권총을 차고 있는 경쾌한 실루엣.
"…말도 안 돼." 한서영의 입에서 떨리는 신음이 새어 나왔다.
두 인영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들의 얼굴은, 분명 강태섭과 최성재였다.
"태섭 씨…? 성재 씨…?" 한서영이 홀린 듯 그들을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하지만 그들의 눈은 공허했다. 초점 없는 눈동자는 오미리와 한서영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 안에는 어떤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마치 잘 만들어진 인형 같았다.
[놀랐나? 너희의 이야기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페이지를 잠시 빌려왔다.] 포식자가 유쾌하게 웃었다. [물론, 결말은 내가 먹어치워서
조금 불완전하지만 말이다. '숭고한 희생'이라는 마지막 페이지가 찢겨 나간 그들은, 이제 영원히 끝나지 않는 싸움을 갈망하는 공허한 전사일 뿐이지.]
그들은 진짜가 아니었다. 오미리와 한서영의 기억 속에서, 그들이 함께 써 내려간 이야기 속에서 강제로 찢겨 나온 '페이지'였다. 포식자는 그들의 가장 소중한 추억을, 가장 잔혹한 무기로 만들어낸 것이다.
"왜…." 강태섭의 모습을 한 '기억의 편린'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감정이 거세된 채 메아리처럼 울렸다. "우리의 이야기는… 왜 거기서 멈췄지…?"
"지켜야 할 게… 더 있었는데…." 최성재의 편린 또한 공허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그들은 자신들의 서사가 '미완'이라는 사실에 고통받고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포식자가 준비한 최악의 만찬이었다. 두 사람이 동료의 모습을 한 적을 공격하지 못하고 절망하는 모습을, 그는 가장 맛있는 요리처럼 감상하고 있었다.
"그만해…! 이 악마 같은 놈!" 한서영이 절규하며 포식자에게 달려들려 했지만, 최성재의 편린이 기계적인 동작으로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오미리 또한 강태섭의 편린과 대치하며 차마 검을 들지 못하고 있었다. 싸울 수가 없었다. 눈앞의 존재가 가짜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몸이, 마음이 말을 듣지 않았다.
바로 그때, 타워 전체가 울리기 시작했다. 포식자가 타워의 핵심 서사, '성공과 야망'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잠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전망대의 유리 벽면에서 검은 잉크 같은 액체가 눈물처럼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가장 높은 자의 눈물이 떨어질 때.' 수수께끼의 마지막 구절이 실현된 것이다.
검은 눈물은 혼돈을 더욱 증폭시켰다. 유리 파편에 비친 환영들이 현실에 뛰쳐나와 비명을 지르며 두 사람을 덮쳤다. 절망과 공포가 극에 달한 순간, 오미리는 깨달았다. 이대로는 끝이다. 포식자의 의도대로, 가장 완벽한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말 것이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외쳤다. "서영! 싸우면 안 돼! 저들은 적이 아니야!"
"하지만…!"
"저들은 길을 잃었을 뿐이야! 우리가… 우리가 그들의 마지막 페이지를 다시 써줘야 해! 기억해, 서영! 그들의 진짜 마지막을!"
오미리의 외침은 절망에 빠져 있던 한서영의 정신을 번개처럼 내리쳤다. 그렇다. 포식자는 결말을 찢어냈지만, 그들의 진짜 이야기는 한서영과 오미리의 기억 속에 온전히 남아있었다.
한서영은 눈을 감았다.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지만, 그녀는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았다. 자신의 가장 소중하고도 아픈 기억의 심층부로 파고들었다. '기억의 직조'를 펼쳤다.
그녀는 N서울타워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렸다. 스스로 빛의 창이 되어 길을 열었던 강태섭의 결의에 찬 얼굴. 모든 것을 불태워 무대를 만들었던 최성재의 마지막 미소. 그것은 결코 미완의 고통이 아니었다. 동료를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진, 완벽하고도 숭고한 '선택'이었다.
"이게… 당신들의 진짜 이야기야!"
한서영의 몸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슬픔을 넘어선, 진실된 기억의 빛이었다. 그 빛은 전장에 펼쳐지며, 혼돈의 환영들을 정화하고, 공허한 두 편린을 부드럽게 감쌌다.
[이건….] [아… 그래… 나는….]
기억의 빛 속에서, 두 편린의 공허한 눈동자에 서서히 초점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찢겨진 결말이 아닌, 동료의 기억 속에 살아있는 진짜 마지막을 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것을 이해했다는 듯 평온한 미소를 지었다.
고통은 사라지고, 안식이 찾아왔다. 두 편린은 오미리와 한서영을 향해 마지막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만족스러운 빛의 입자가 되어 흩어졌다. 이야기가 마침내 제자리를 찾은 것이다.
[네 이놈…! 감히 내 식사를…!]
가장 즐거운 순간을 방해받은 포식자가 분노에 찬 비명을 질렀다. 진실된 기억의 빛은 그에게 맹독과도 같았다. 그는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며, 서둘러 어둠 속으로 자신의 모습을 감췄다.
혼돈이 걷히고, 전망대에는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오미리와 한서영은 동료들이 사라진 자리를 망연히 바라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겼지만, 이긴 것 같지 않은 싸움이었다. 마음에는 그 어느 때보다 깊은 상처가 새겨졌다.
포식자가 사라진 자리에는, 어김없이 또 하나의 찢겨진 페이지가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확인할 기력조차 없었다.
적은,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었다. 오미리는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차가운 분노가 다시금 타오르기 시작했다. 다음 만남이, 저 악마의 마지막 페이지가 될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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