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앙의 도서관

쉰두 번째 책: 기억의 편린을 찾아서

risingduck 2025. 9. 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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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 거리에 남겨진 정적은 무거웠다. 결말을 잃고 유령처럼 떠도는 이야기들의 침묵은, <이야기 상담소>를 운영하며 마주했던 어떤 슬픔보다도 차갑고 절망적이었다. '페이지 포식자'가 남기고 간 단 한 장의 찢겨진 페이지. 그것은 새로운 재앙의 서막을 알리는 초대장이자, 풀어야만 하는 저주받은 수수께끼였다.

 

상담소로 돌아온 두 사람 사이에는 말이 없었다. 한서영은 창백한 얼굴로 찢겨진 페이지를 들여다보았고, 오미리는 텅 비어버린 헌책방의 풍경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이전의 적들과는 달랐다. 세상의 파괴나 지배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직 이야기의 '완결'을 부

수고, 그 속에서 피어나는 영원한 고통과 절망을 즐기는 순수한 악의. 그런 존재를 상대로 '치유'와 '안내'가 통할 리 없었다.

 

"…'가장 오래된 노래가 잠든 곳에서, 첫 번째 침묵이 울려 퍼질 때.'" 한서영이 마른 입술로 수수께끼를 되뇌었다. "가장 오래된 노래라면… 뭘까. 애국가? 아니면… 더 이전의…."

 

"판소리나 향가 같은 것들일 수도 있어." 오미리가 지도를 펼치며 말했다. 그녀의 눈은 이미 다음 단서를 쫓고 있었다. "문제는 '첫 번째 침묵'이야. 너무 추상적이야. 해가 뜰 때인지, 공연이 끝났을 때인지… 단서가 부족해."

 

바로 그때, 한서영의 몸이 가늘게 떨려왔다. "…들려…."

 

"뭐가?"

 

"노랫소리가… 아니, 노래의 '빈자리'가 느껴져. 아주 오래된 가락인데… 중간중간이 끊어져 있어. 마치… 기억이 좀먹은 것처럼." 한서영은 자신의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기억의 직조' 능력이, 세상에 풀려난 이야기들 중 근원이 되는 '노래' 서사들이 훼손되고 있음을 감지한 것이다. 헌책방에서처럼 이야기가 통째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아주 교묘하게, 핵심적인 선율과 가사, 즉 '기억의 편린'들이 조금씩 지워져 나가고 있었다.

 

그녀가 느끼는 기억의 공백은 하나의 장소를 가리키고 있었다. 한국 전통 음악의 모든 것이 보존되고 연주되는 곳. 오미리는 한서영의 시선이 닿은 곳을 따라 지도 위 한 점을 짚었다.

 

"국립국악원." 가장 오래된 노래가 잠든 곳. 그곳이었다.

 

"첫 번째 침묵은… 아마도 새벽일 거야. 모든 소리가 잠들고, 첫 공연이 시작되기 전, 악기들이 숨을 죽이고 있는 그 시간을 노리는 걸지도 몰라." 오미리의 목소리에 다시금 과거의 냉철함이 돌아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밤을 기다렸다. 평화로운 시대에 맞춰 넣어두었던 전투 장비를 다시 꺼내고, '만상'과 '진혼'을 손질했다. 상담소의 따뜻한 불빛 아래, 두 사람의 눈에는 다시 전사의 빛이 감돌았다.

 

새벽의 국립국악원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 고요히 잠긴 현대적인 건물은, 그 안에 수백 년의 소리를 품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평온했다. 하지만 담을 넘어 안으로 들어선 순간, 두 사람은 이곳의 공기가 뒤틀려 있음을 느꼈다.

 

소리가 없었지만 시끄러웠다. 수많은 악기들이 내는 고유의 울림, 악보에 잠든 이야기들의 숨결이 있어야 할 공간에, 부자연스러운 정적과 함께 무언가 '지워지고 있다'는 불길한 파동만이 가득했다.

 

"…악기들이 울고 있어." 한서영이 속삭였다. 그녀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비명이 들려왔다. 가야금의 현이 품었던 애달픈 사연, 대금의 구멍을 스치던 바람의 기억, 장구의 가죽이 기억하던 숱한 희로애락이 힘을 잃고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두 사람은 본능적으로 가장 오래된 유물들이 보관된 '국악박물관'으로 향했다. 육중한 유리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그들은 숨을 삼켰다. 박물관 내부는 어둠에 잠겨 있었지만, 그 어둠 속에서 수십, 수백 개의 희미한 빛무리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기억의 편린'이었다. 악기와 악보에서 뜯겨져 나온 이야기의 조각들이었다. 어떤 것은 춘향가의 한 구절이었고, 어떤 것은 이름 모를 민요의 후렴구였으며, 또 어떤 것은 세종이 만들었다는 정간보의 음표 하나였다.

 

그리고 그 편린들의 중심에서, '페이지 포식자'가 만족스러운 듯 그 빛들을 음미하고 있었다. 그것은 전시된 가장 오래된 악기, 신라 시대의 거문고 유물 앞에 서서, 거문고가 품고 있던 마지막 '기억의 편린'을 막 끄집어내려던 참이었다.

 

[왔군. 내 만찬을 방해할 손님들.]

 

포식자의 공허한 얼굴이 그들을 향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맛인가. 수백 년간 이어져 온 이야기의 결말. 이 기억들이 사라지면, 이 땅의 모든 노래는 뿌리를 잃고 방황하게 되겠지. 위대한 서사의 죽음이다!]

 

"네놈의 만찬은 여기까지야." 오미리가 쌍단검을 겨누며 앞으로 나섰다.

 

[흥미롭군. 너희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결말을 지키려 하다니.]

 

포식자는 손짓했다. 그가 끄집어냈던 기억의 편린들이 일제히 두 사람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것들은 더 이상 아름다운 노래가 아니었다. 결말을 잃고 분노와 슬픔만 남은 원념의 파편이 되어,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공간을 할퀴었다.

 

"서영, 기억들을 막아줘!" "안돼! 저건 공격하면… 완전히 소멸해 버릴 거야!"

한서영이 다급하게 외쳤다. 원념이 되었어도, 저것들은 소중한 이야기의 일부였다. 오미리는 날아오는 파편들을 베지도, 막지도 못하고 회피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때, 포식자는 비어있는 거문고를 향해 손을 뻗었다. 마지막 남은 핵심 기억, 모든 국악의 시초가 되는 '첫 번째 노래'의 기억을 완전히 흡수하려는 순간이었다.

 

"안 돼!" 한서영은 본능적으로 몸을 날렸다. 그녀는 공격을 막으려 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두 팔을 벌려, 흩어져 날아다니는 모든 기억의 편린들을 자신의 몸으로 받아내기 시작했다.

 

"서영!" 오미리가 경악하며 외쳤다.

 

"괜찮아…! 이게…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야…!" 한서영의 온몸으로 수백 개의 이야기 조각들이 파고들었다. 그녀의 머릿속은 수백 년의 세월과 수만 가지의 감정이 뒤엉킨 혼돈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정신이 갈가리 찢겨 나가는 듯한 고통 속에서, 그녀는 필사적으로 '기억의 직조'를 펼쳤다.

 

그녀는 싸우고 있지 않았다. 기억하고 있었다. 흩어진 멜로디를 잇고, 지워진 가사를 떠올리고, 잊혀진 감정을 되살려내고 있었다. 그녀 자신이 거대한 악보가 되어, 찢겨진 노래들을 하나의 온전한 악장으로 재구성하고 있었다.

 

[어리석긴! 그 혼돈 속에서 네 정신이 먼저 부서질 것이다!] 포식자가 비웃으며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는 순간, 오미리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네 상대는 나다." 오미리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그녀는 더 이상 한서영을 보호하기 위해 수세에 몰리지 않았다. 한서영이 시간을 버는 동안, 그녀는 이 재앙의 근원을 파괴하기로 결심했다. "네놈에게는 결말조차 사치야. 그저 '삭제'해주지."

 

오미리가 전력으로 포식자에게 달려드는 그 순간, 한서영의 입에서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하나의 노래가 아니었다. 그녀가 받아들인 수백 개의 기억의 편린들이 하나로 합쳐져 만들어진, 태초의 울림이었다. 슬프면서도 힘차고, 거칠면서도 아름다운, '가장 오래된 노래'가 마침내 복원된 것이다.

 

그 노래는 빛이 되어 박물관 전체를 채웠다. 결말을 잃었던 모든 이야기들이 그 빛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며 안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그 빛은, 불완전함과 공허함을 힘의 근원으로 삼는 페이지 포식자에게는 가장 끔찍한 독이었다.

 

[크아아악…! 이… 이 빛은…! 완결된… 이야기의…!]

 

포식자의 몸이 빛에 닿자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그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그림자 속으로 황급히 몸을 숨겼다.

모든 것이 끝나자, 한서영은 그 자리에 쓰러졌다. 노래는 멈췄지만, 박물관 안은 복원된 이야기들이 내는 은은한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오미리는 쓰러진 한서영을 부축했다. 그녀는 탈진했을 뿐, 다행히 정신은 무사했다.

 

포식자가 사라진 자리에는, 이번에도 찢겨진 책 페이지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오미리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거울 속에 비친 진실이 거짓을 말하는 탑에서, 가장 높은 자의 눈물이 떨어질 때.'

 

적은 또다시 다음 무대를 예고하고 떠났다. 하지만 두 사람은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적의 목적을 알았고, 그에 맞서는 법도 찾아냈다.

 

오미리는 한서영을 부축해 일으켰다. "돌아가자. 그리고… 준비해야지."

세상의 모든 기억이, 모든 결말이 사라지기 전에. 찢겨진 페이지들을 모두 되찾기 위한 긴 추적이,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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