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앙의 도서관

쉰한 번째 책: 찢겨진 페이지들

risingduck 2025. 9. 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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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건되는 세계의 시간은 평화롭게 흘렀다. <이야기 상담소 '페이지 터너'>는 북촌의 명물이 된 지 오래였다. 사람들은 그곳의 주인이 누구인지,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 몰랐지만, 그 작은 한옥이 생긴 이후로 도시의 기이한 현상들이 점차 안정을 찾아간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길 잃은 이야기들은 더 이상 현실을 침식하며 폭주하는 대신, 도시의 풍경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작은 기적들이 되었다.

 

오미리와 한서영에게도 그 평화는 익숙해져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새로 접수된 '의뢰'를 확인하고, 현장으로 나가 길 잃은 이야기와 소통하며 그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저녁에는 상담소로 돌아와 그날의 기록을 하얀 책에 써 내려가는 일상. 그것은 과거의 치열했던 싸움을 보상받는 듯한, 소중하고도 고요한 나날이었다.

 

그날 오후도 그랬다. 두 사람은 며칠간 공들였던 '스스로 움직이는 동상' 사건을 막 해결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자신의 모델이 되어준 주인을 잊지 못해 밤마다 몰래 미술관을 빠져나오던 동상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의 슬픔을 기리는 작은 기념비를 세워주는 것으로 이야기는 평온한 결말을 맞았다.

 

"이제 저 동상도 편히 쉴 수 있겠지." 한서영이 안도하며 말했다.

 

"그래. 좋은 이야기였어." 오미리도 동의했다. 그녀의 '심판'은 이제 날카로운 칼날이 아닌, 이야기의 엉킨 실타래를 풀어주는 섬세한 바늘이 되어 있었다.

 

상담소의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두 사람은 공기가 심상치 않음을 동시에 느꼈다. 평화로운 일상의 공기가 아니었다. 날카로운 파열음이 지나간 자리처럼, 모든 것이 팽팽하게 긴장해 있었다.

 

"이건…." 한서영의 얼굴이 하얗게 굳었다. 그녀는 방 한가운데 놓인 라디오, 즉 서사의 파동을 감지하는 장치를 다급하게 가리켰다.

 

"아까부터 계속… 저 소리가…."

 

라디오에서는 평소처럼 이야기의 속삭임이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종이가 찢어지는 듯한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누군가의 비명이 단말마처럼 터져 나왔다가 끊어지기를 반복했다.

 

[…안돼… 나의… 마지막이…! 누군가… 이야기를… 먹고 있어…!] [기억… 사라져… 내가… 누구였는지… 크악…!]

 

그것은 도움을 요청하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이야기의 존재 자체가 '소멸'되며 지르는 마지막 비명이었다. 한서영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기억의 직조' 능력을 통해, 라디오 너머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포식'의 감각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마치 그녀의 기억 일부가 강제로 찢겨 나가는 듯한 고통이었다.

 

오미리는 즉시 벽에 걸린 서울 지도로 달려갔다. 비명이 들려오는 곳을 나타내는 붉은 핀은,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책들이 모여 있다는 '헌책방 거리'를 가리키고 있었다.

 

"서영, 괜찮아?" "가야… 해…. 늦으면… 전부 사라져 버릴 거야…."

 

두 사람은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동료들의 유품을 챙겨 들고, 곧바로 헌책방 거리로 향했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 거리는 기이할 정도로 고요했다. 수십 년간 쌓인 책의 무게와 그 안에 잠든 이야기들의 숨결로 가득해야 할 공간에, 부자연스러운 침묵만이 감돌았다. 마치 소리의 진공 상태에 들어온 것 같았다.

 

"…너무 조용해." 오미리가 쌍단검을 꺼내 들며 나직이 말했다. 이곳의 모든 이야기가 겁에 질려 숨을 죽이고 있었다. 아니, 숨을 죽인 것이 아니었다. '존재' 자체가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두 사람은 거리에서 가장 큰 헌책방으로 들어섰다. 문을 열자, 퀴퀴한 먼지와 함께 무언가 '빠져나간' 듯한 공허함이 그들을 덮쳤다. 책들은 서가에 그대로 꽂혀 있었지만, 그 안의 활자들이 군데군데 비어 있거나, 페이지의 마지막 부분들이 마치 산(酸)에 녹아내린 것처럼 지워져 있었다.

 

이야기들이 '살해'당한 현장이었다.

 

"이럴 수가…." 한서영은 떨리는 손으로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유명한 고전 소설이었다. 하지만 책의 마지막 장은 텅 비어 있었다. 주인공이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행복을 찾는, 그 가장 중요한 결말 부분이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결말을 잃은 이야기는 더 이상 완결된 서사가 아니었다. 앞으로 나아가지도, 뒤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 영원히 중간에 갇혀버린, 살아있는 유령에 불과했다.

 

오미리는 눈을 감고 이 공간에 남은 잔향을 읽었다. 슬픔이나 분노 같은 감정의 찌꺼기가 아니었다. 지독한 허기와 만족감. 무언가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운 포식자의 흔적이었다.

 

그때, 서가 깊은 곳에서 희미한 흐느낌이 들려왔다. 두 사람은 소리가 나는 곳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곳에는 어린 왕자의 모습을 한, 반투명한 이야기의 형상이 웅크린 채 떨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불안정했다. 별과 장미에 대한 기억이 군데군데 지워져, 그의 몸은 노이즈 낀 화면처럼 계속해서 깜빡거렸다.

 

"괜찮아, 우리가 도와주러 왔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한서영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어린 왕자의 형상은 겁에 질린 눈으로 두 사람을 보더니, 서가 저편을 가리켰다. [그림자… 검은 그림자가… 책의 끝을… 찢어서 먹어버렸어요….]

 

"그림자?" 오미리가 되물었다.

 

바로 그 순간, 헌책방 가장 깊은 곳의 어둠이 일렁이며 하나의 형체를 만들어냈다. 그것은 '이야기 오류의 화신'처럼 거대하지도, '첫 번째 사서'처럼 위엄 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존재감은 훨씬 더 원초적이고 폭력적인 공포를 자아냈다.

 

인간의 실루엣을 하고 있었지만,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나간 책의 파편과 의미를 알 수 없는 글자들이 뒤엉켜 혼돈스럽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작은 블랙홀처럼 공허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것이 바로, 이야기의 '결말'만을 포식하는 존재, '비블리오클라스트(Biblioclast, 성상 파괴자)' 혹은 '페이지 포식자'였다.

 

[새로운… 먹잇감인가….]

 

포식자의 목소리는 찢긴 종이가 바람에 스치는 소리 같았다. [너희들의 이야기는… 아주 맛있을 것 같군. 어떤 결말을 가지고 있지?]

그것은 오미리와 한서영을 단순한 적이 아닌, '음미해야 할 책'으로 보고 있었다.

 

"네놈이… 이 서점의 이야기들을 전부…!"

 

"전부 먹지는 않았어. 결말만 빼고." 포식자는 조롱하듯 말했다. [결말이 없는 이야기만큼 공허하고 맛있는 절망은 없거든. 영원히 끝나지 않는 고통 속에서 발버둥 치는 꼴을 감상하는 게 내 유일한 취미다.]

 

그것은 단순한 포식자가 아니었다. 타인의 서사가 미완으로 끝나 고통받는 것을 즐기는, 악의 그 자체였다. 오미리는 쌍단검을 고쳐 쥐었다. 상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지금까지의 그 어떤 적과도 달랐다. 세상의 파괴나 지배가 아닌, 순수한 유희를 위해 타인의 존재를 훼손하는 자. 그녀의 '심판'이 가장 경멸하는 유형의 적이었다.

 

[자, 너희의 마지막 페이지를 내놓아라!]

 

포식자의 몸에서 수십 개의 검은 촉수가 뻗어 나오며, 책장에서 결말이 찢긴 책들을 뽑아 두 사람에게 집어 던졌다. 책들은 허공에서 펼쳐지며, 결말을 잃고 미쳐버린 주인공들의 원념이 되어 그들을 덮쳤다.

 

"서영, 뒤로 물러서!"

 

오미리가 앞으로 나서며 단검을 휘둘러 원념들을 베어냈다. 하지만 베어낸 원념들은 다시 책 속으로 돌아가 끝없이 재생되었다. 결말이 없기에, 그들의 고통 또한 끝나지 않는 것이다.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오미리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지금까지의 방식은 통하지 않았다. 상대는 '치유'나 '안내'를 바라는 존재가 아니었다. 오직 '파괴'만을 이해하는 적이었다. 평화로운 시대는 끝났다. 다시, 전사가 되어야 할 시간이었다.

 

포식자는 그들의 고전하는 모습을 즐겁게 감상하다가, 문득 흥미를 잃은 듯 몸을 돌렸다. [시시하군. 아직은 너희를 맛볼 때가 아닌 것 같군. 좀 더 절망하고, 발버둥 치다가… 최고의 비극을 완성했을 때, 그때 다시 찾아오마.]

 

그는 찢어진 책 페이지 하나를 바닥에 떨어뜨리고는, 그림자 속으로 아무렇지 않게 녹아들어 사라졌다.

모든 위협이 사라진 헌책방에는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오미리는 바닥에 떨어진 찢겨진 페이지를 집어 들었다. 그곳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시(詩) 한 구절이 적혀 있었다.

 

'가장 오래된 노래가 잠든 곳에서, 첫 번째 침묵이 울려 퍼질 때.'

 

그것은 다음 범행 장소에 대한 예고였다. 새로운 적은, 자신들과 놀이를 하자는 것이었다.

오미리는 찢겨진 페이지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재건되던 평화로운 세계. 그 세계의 책장에, 누군가 칼을 들고 나타났다.

이야기 상담소 '페이지 터너'의 시대는 끝났다. 이제부터는, 세상의 모든 결말을 지키기 위한 '사냥'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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